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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a Pio XI primi piani Papa Pio XI primi piani 

“저는 평화의 집을 지을 것입니다”… 격동의 세기를 관통한 평화의 목자, 비오 11세 교황 특별전

168년 전 봄날, 롬바르디아의 고요한 마을 데시오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킬레 라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온 그 아이는 훗날 전체주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던 시대에 평화의 등불을 밝힌 비오 11세 교황이 된다. 그의 고향에서 펼쳐지는 “교황들의 희년” 프로젝트는 단순한 회고전을 넘어선다. 프란체스코 탈리아부에가 정성껏 직조해낸 이 멀티미디어 서사는 한 인간의 영적 여정이 어떻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는지를 보여준다. 개막의 그 순간, 다리오 에도아르도 비가노 몬시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오 11세와 커뮤니케이션: 1925년과 1933년 희년의 주역”이라는 제목 아래, 한 교황이 새로운 시대의 언어로 영원한 진리를 전하려 했던 열정적 시도가 펼쳐진다.

Eugenio Murrali

 

“하느님의 평화는 모든 지성을 초월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맹목적인 탐욕을 다스리고, 물질적 재화에 대한 욕심이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분열과 다툼, 불화를 피할 수 있습니다.” 1922년 12월 23일, 비오 11세 교황이 회칙 「Ubi Arcano Dei Consilio」에 새겨 넣은 이 말씀이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화두였다. 1922년부터 1939년까지 전체주의 시대의 엄중한 현실과 맞서며 교황직을 수행한 이 교황의 평화 사상과 교도권에 헌정된 전시회 “저는 평화의 집을 지을 것입니다”가 데시오의 웅장한 쿠사니 트라베르시 티토니 궁에서 열렸다. 전시회는 비오 11세 교황의 탄생일인 5월 31일, 교황청립 과학원과 교황청립 사회학술원의 부원장이자 가톨릭 시청각기억재단(MAC) 이사장인 다리오 에도아르도 비가노 몬시뇰의 개막사로 막을 올렸다. 이어 비오 11세 국제연구문헌센터(CISD Pio XI)의 아고스티노 가바치 소장과 프란코 카야니 사무총장, 비오 11세 생가 후원회의 클라우디오 라자로토 회장, 데시오 시 행정관 알폰소 테리빌레의 말이 이어졌다.

시간을 가로지르는 영혼의 여정

프란치스코 탈리아부에 감독이 세심하게 설계한 전시 동선은 대형 화폭에 재현된 이미지와 텍스트로 구성된 18개 구역으로 나뉜다. 관람객은 인터랙티브 화면에 손을 올리기만 하면 비오 11세의 생애와 업적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관람할 수 있다. 전시 공간 중 하나는 몰입형 체험실로, 관람 전체가 역사 속으로 빠져드는 체험을 선사한다. 대형 스크린에는 옛 루체 뉴스릴이 상영되고, 인터랙티브 도서는 비오 11세 교황이 꿈꾼 바티칸 “르네상스”를 소개한다. 또한 비오 11세 생가 재단 박물관 소장품들과 18세기 경당에 재현된 감동적인 디지털 영상들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6월 3일부터 일반에 공개되며, 비오 11세 국제연구문헌센터와 데시오 시를 비롯한 여러 기관이 참여한다. 또한 20세기 롬바르디아와 베네토 출신 교황들인 성 비오 10세, 비오 11세 교황, 성 요한 23세 교황, 성 바오로 6세 교황, 복자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생가를 연결해 소개하는 “교황들의 희년” 특별 프로젝트에도 참여한다.

비오 11세 교황과 희년 행사들

개막식 강연에서 비가노 몬시뇰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에 대한 비오 11세 교황의 관점을 상세히 다뤘다.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19세기가 지난 때를 기념한 1925년 정기 희년과 1933년 특별 희년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그는 또 두 희년 사이에 있었던 1929년 희년도 언급했다. 이는 교황의 사제품 50주년을 기념하여 선포된 것으로, 라테라노 조약 체결과 월가 금융 위기가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비가노 몬시뇰은 이렇게 말했다. “비오 11세 교황님은 이러한 계획들을 통해 단순히 상징적 차원이 아니라, 전후 위기가 촉발한 정체성과 가치관의 파편화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셨습니다. (…) 1925년 12월 11일 성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비오 11세 교황님이 회칙 「처음의 것」(Quas primas)을 반포하여 전례력에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도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로써 그리스도 왕권의 공적 승인을 확립했던 것입니다.”

비오 11세 교황과 영화

비가노 몬시뇰의 발언에서는 비오 11세 교황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 관계의 몇 가지 중요한 측면이 부각됐다. 특히 비오 11세 교황은 현재까지 영화를 주제로 한 회칙을 독립적으로 반포한 유일한 교황이다. MAC 재단 이사장인 비가노 몬시뇰은 “1936년 미국 주교단에게 보낸 회칙 「Vigilante cura」를 통해 이 매체가 가톨릭 메시지를 세계화할 수 있는 잠재력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고 분명히 밝혔다”고 지적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희년 기념 행사 촬영 영상의 배급 관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바로 이 점에서 “영화와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교황 사유의 발전을 가장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비가노 몬시뇰은 강조했다. 1925년과 1929년 성년에는 가톨릭 공식 전례 예식 중 교황 모습을 촬영하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이러한 금지 조치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25년 전 희년 때 일어난 일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상당한 부담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당시 바이오그래프 사가 레오 13세 교황님의 영상을 (…) 얼마 전 확보한 영화 특종을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희년”(Jubilaeum)과 1933년 성년 희년

전환점은 아킬레 라티(비오 11세) 교황이 선포한 마지막 희년인 1933년에 찾아왔다. 비가노 몬시뇰은 “그 희년은 비오 11세 교황이 이탈리아 가톨릭 액션이 운영하는 성년 희년 중앙위원회 산하에 영화 연구 및 제작 센터를 설립하여, 로마 가톨릭 대형 예식의 체계적 조직 운영에 영화가 특별한 방식으로 참여하기를 원했던 순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센터의 첫 번째 사업은 성년 희년 공식 영화 <희년> 제작이었다. 이 영화는 현재 소실된 상태이며, 당시 특히 미국에서 배급과 관객 반응 면에서 실패작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가노 몬시뇰은 발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1925년과 1929년 희년 때 비오 11세 교황님은 엄격한 방침을 세웠습니다. 교황의 모습을 촬영하는 것을 전면 금지하신 것입니다. 당시 영화 제작자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바로 교황의 모습을 담는 것이었는데, 이를 완전히 차단해버린 셈이었습니다. 그 결과 역사에는 희년을 맞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수많은 신자들의 환희에 찬 모습은 기록되었지만, 정작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모습은 전혀 담기지 않은 아이러니한 영상 기록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33년 희년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당시 영화는 여전히 상업적 이익을 위해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뒤섞어 놓고, 그리스도교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을 퍼뜨리는 매체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려 때문에 교황청은 아예 직접 나서기로 했습니다. 상업적 목적의 영화사에 맡기지 않고, 교황청이 직접 희년 공식 영화 <희년>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영화는 당시 특히 미국에서 흥행에 실패했고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교황청 역사상 처음으로 영화를 직접 제작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교회가 새로운 매체인 영화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번역 이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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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6월 2025, 12:10